하나님의 뜻.180-195], 너 거기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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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성식 댓글 0건 조회 495회 작성일 16-03-25 15:29본문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22:7=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1.하나님의 선하시고,
2.기뻐하시고,
3.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오늘도 많은 경건한 성도들은 이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금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주님의 사랑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과연 거기 있었는제 묻고 싶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금수저,흙수저는 고사하고 예를 들어 우리들 주변에도 친부모가 아니라서 아이들이 학대 받는 현장에 있지만 그저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하는 일은 없는가?
뿐만 아니라,
그 무엇보다 오늘날 가나안 성도가 무려 수백만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되는가?
그들이 왜? 무엇 때문에 가나안 성도가 되었는지 한번 이라도 생각을 해 보았는지?
또, 왜 이렇게 기독교가 ;개독;이 되었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는지?
아니 큰 교회? 또는 남의?교회의 일로 치부하지는 아니한지?
우리교회와는 상관이 없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무엇보다 저들을 위한 친위대는 또 무엇인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는 성경 말씀은 어디로 가 버리고 인간의 비위만 맞추려는 생각들로만 가득하고서 어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고 할 수가 있을까?
꼭 예수님 당시의 생황과 비슷하지 않은가?
어제까지만 하여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환호성을 지르며 심지어 자기들의 옷가지라도 길에 펴며 대단한 일?을 하는것 같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죄인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충동된 저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아니 나의 모습은 아닌지 마음속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적은 것에는 교회에서는 거룩한 모습인데 식당에 가서는 꼬리를 내리고 식사 기도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하지 않으며 부를 때는 목사 장로 집사라고 부리기 보다는 어디 사장님 또는 사모님이라고 부르지는 아니한가?
이것을 가르쳐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너희를 안다고 하지만 부인한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도 너희들을 모른다고 하시지 않으셨나?
또,
갖추기는 갖추는 것 같은데? 상식 이하로 심하게 무례하게 대한다면 이것 또한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한 때 교회는 정말 사회의 약자를 보듬는 일에 서슴치 않았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는 왜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엇는가?
교회가 번영신학에 물들고 탐심의 우상인 돈에 맛들이게 되고 권력의 맛을 본 순간부터 교회는 이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이 저의 생각이라고만 볼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으셨는데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그러면서,
대야에 물을 담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도 닭 울기 전에 세번 선생된 예수님을 배반하였는데 우리들은 과연 어떠한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도 수에도 치지 않은 여인들이었으며,
부활의 주님을 먼저 본 이도 여인이었다.
온갖 멸시와 수치를 당하는 현장에 내가 없다면 과연 그 십자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주님 십가가 못박히실 때 그대 그곳에 간 일 있느냐...........
오~~~~오~~ 그 생각 떠오를 때 떨려 떨려.......
그대 그곳에 간일 있느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1.하나님의 선하시고,
2.기뻐하시고,
3.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오늘도 많은 경건한 성도들은 이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금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주님의 사랑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과연 거기 있었는제 묻고 싶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금수저,흙수저는 고사하고 예를 들어 우리들 주변에도 친부모가 아니라서 아이들이 학대 받는 현장에 있지만 그저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하는 일은 없는가?
뿐만 아니라,
그 무엇보다 오늘날 가나안 성도가 무려 수백만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되는가?
그들이 왜? 무엇 때문에 가나안 성도가 되었는지 한번 이라도 생각을 해 보았는지?
또, 왜 이렇게 기독교가 ;개독;이 되었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는지?
아니 큰 교회? 또는 남의?교회의 일로 치부하지는 아니한지?
우리교회와는 상관이 없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무엇보다 저들을 위한 친위대는 또 무엇인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는 성경 말씀은 어디로 가 버리고 인간의 비위만 맞추려는 생각들로만 가득하고서 어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고 할 수가 있을까?
꼭 예수님 당시의 생황과 비슷하지 않은가?
어제까지만 하여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환호성을 지르며 심지어 자기들의 옷가지라도 길에 펴며 대단한 일?을 하는것 같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죄인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충동된 저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아니 나의 모습은 아닌지 마음속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적은 것에는 교회에서는 거룩한 모습인데 식당에 가서는 꼬리를 내리고 식사 기도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하지 않으며 부를 때는 목사 장로 집사라고 부리기 보다는 어디 사장님 또는 사모님이라고 부르지는 아니한가?
이것을 가르쳐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너희를 안다고 하지만 부인한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도 너희들을 모른다고 하시지 않으셨나?
또,
갖추기는 갖추는 것 같은데? 상식 이하로 심하게 무례하게 대한다면 이것 또한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한 때 교회는 정말 사회의 약자를 보듬는 일에 서슴치 않았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는 왜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엇는가?
교회가 번영신학에 물들고 탐심의 우상인 돈에 맛들이게 되고 권력의 맛을 본 순간부터 교회는 이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이 저의 생각이라고만 볼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으셨는데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그러면서,
대야에 물을 담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도 닭 울기 전에 세번 선생된 예수님을 배반하였는데 우리들은 과연 어떠한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도 수에도 치지 않은 여인들이었으며,
부활의 주님을 먼저 본 이도 여인이었다.
온갖 멸시와 수치를 당하는 현장에 내가 없다면 과연 그 십자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주님 십가가 못박히실 때 그대 그곳에 간 일 있느냐...........
오~~~~오~~ 그 생각 떠오를 때 떨려 떨려.......
그대 그곳에 간일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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